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사회] 스타트렉 TNG에서 본, 인권에 대한 좋은 문구

요즘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Star Trek: The Next Generation)을 '정주행' 하고 있는데,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드라마인 것 같다.  다른 SF처럼 실제와 상상을 섞어 그럴싸한 과학 용어를 동원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가지만, 주제는 상당히 철학적인 것들이다. 나같은 일반인이 따라가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는 깊은 주제를 파고들어갈 때가 많다. 주인공인 피카드 선장(Captain Jean-Luc Picard)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드라마가 그렇게 인기를 끌고 지금까지도 미국 대중문화의 한 흐름을 만들고 있다니 놀랍다. 하긴 지금 같으면 많은 시청자들이 골치 아픈 이야기보다는 수많은 다른 채널 중에 하나에서 나오는 자극적인 내용을 선택할 테니 이런 드라마는 수명이 짧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볼 거리가 별로 없다 보니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좋은 내용을 담을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여간, 어제 본 에피소드(시즌 4 의 에피소드 21, "Drumhead")에서 감명깊은(?) 대사들이 줄줄이 나오는 바람에 보다 말고 메모를 하게 됐고, 다른 사람들과도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 여기에 적어 둔다.

이야기는 적국인 로뮬란 제국의 스파이를 찾기 위해 '공안수사 전문가' 사티 제독(즉 피카드 선장보다 계급이 높다)이 승선하면서 시작된다. 로뮬란의 스파이는 곧 잡혔지만 사티 제독은 내통자가 더 있을 수 있다며 스파이와 접촉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한 선원이 할아버지가 로뮬란 인임을 속이고 우주함대에 들어온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대한 마녀 사냥이 시작된다. 이런 일들을 막으려고 노력하는 피카드 선장이 하는 말들이 다음과 같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세 번에 걸쳐 언급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첫 번째 구절은 피카드가 어떤 책을 인용했다고 말하지만 이야기 속의 책이니 그냥 작가가 쓴 것으로 보인다.  (한글 자막을 못 구해 '어쩔 수 없이' 영어 자막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번역은 내가 한 것이다.)


With the first link the chain is forged.
The first speech censored,
the first thought forbidden,
the first first freedom denied
chains us all irrevocably.

첫 번째 고리가 만들어질 때 사슬은 만들어진다.
처음으로 표현이 검열당할 때,
처음으로 생각이 금지당할 때,
처음으로 자유가 구속당할 때,
우리 모두는 풀 수 없는 사슬에 묶인다.

...


We think we've come so far.
Torture of heretics, burning of witches is all ancient history.
Then, before you can blink an eye, suddenly,
it threatens to start all over.

우리는 이만큼이나 이뤘다고 생각하지.
이단자를 고문하고, 마녀를 불태운 건 먼 역사 속의 일이라고.
그러다가 갑자기, 눈 한 번 깜박하기도 전에
그 모든 일이 다시 시작되는 거야.

...

Villains who twirl their mustaches are easy to spot.
Those who clothe themselves in good deeds are well-camouflaged.
[They] will always be with us waiting for the right climate in which to flourish
spreading fear in the name of righteousness.
Vigilance. That is the price we have to continually pay.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악당은 알아보기 쉽다네.
훌륭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자들이야말로 위장의 명수지.
[그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네.
옳은 일을 하는 척 공포를 퍼뜨리며
기세를 떨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일세.
깨어 있어야 하네.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치러야 할 대가이니까.

2015년 5월 9일 토요일

[교육] 경쟁과 경쟁력

흔히 경쟁을 유발하면 경쟁력이 생긴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지 잠시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무제한의 경쟁,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경쟁력이 강한 쪽이 승리한다. 그 다음은? 한번 승리한 쪽은 계속 승리한다. 아니 경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승자가 ‘독식’을 할 뿐이다. 이와 같이 아무 제약 없는 경쟁은 지속가능한 시스템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부추기지 않아도 경쟁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그것에 제동을 거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과당 경쟁을 막아야 그 시스템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경우, 학생과 학부모는 굉장히 큰 것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사회적 지위, 미래의 안락한 생활, 자아실현의 기회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승자독식’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승자가 되지 못하면 사회적 지위도, 안락한 생활도, 자아실현의 기회도 빼앗긴다? 극단적인 경쟁이 일어난다. 패자는 얻고자 했던 것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것까지 잃는다. 반면 승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차지한다. 오늘날 현실이 그와 가깝다.

그렇다면 ‘국민 개인의 기본적 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승자독식’을 막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교육에서 승자독식이란, 대학입시의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 번 서열 높은 대학에 입학하면 그것만으로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동문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하는 식으로 승승장구하는 반면, 그런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훨씬 더 노력해도 기회를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공교육이 그 목적을 이루려면 이런 상태를 막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경쟁을 놔둔 채로 입시제도나 고등학교 교육과정 같은 것을 바꿔서 사교육비나 공교육 불신 같은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면피용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 상태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 경쟁에서 이길 '실탄'이 충분한 자들이 하는 말이다.  정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경쟁을 약화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대학의 서열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논점 일탈이 등장한다.  대학의 서열은 기업들이 명문대 졸업생을 선호하기 때문이므로 기업들이 출신대학에 따른 차별을 안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대학이나 정부 쪽에서 만들어 낸, 책임전가용 멘트다.  내가 기업의 신입사원을 뽑는 담당자라고 생각해 보자.  수많은 지원자들의 능력이나 인성을 속속들이 파악할 방법은 어차피 없다.  주어진 정보로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  그런데 서열 높은 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이미 '머리가 좋고, 윗사람 말 잘 듣고,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검증을 거친 것으로 봐야 한다.  출신대학을 고려하는 것은 기업으로서는 너무나 손쉽게 원하는 사원을 뽑을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이걸 어떻게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기업에서 마지못해 출신대학을 고려하지 않고 능력과 인성을 보아 뽑는다고 선전을 할 지 몰라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대부분 유명한 대학 출신을 뽑고 구색맞추기로 유명하지 않은 대학 출신자 몇 명을 뽑아 놓고는 '이거 봐라, 우리 회사는 유명 대학 안 나와도 들어올 수 있다' 고 선전할 것이다.

그렇다.  그냥 대학서열을 인위적으로 없애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사실 대학서열의 정체는 '수능 커트라인 서열'에 불과하다.  수능 커트라인만 통일하면 대학 서열을 깨뜨릴 수 있다.  쉽지 않은가?  수능을 자격고사로 하여, 합격한 학생들은 모두 대학에 갈 수 있되 거주지 등을 고려하여 국가가 지정해 주는 대학에 가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대학에 강제할 필요도 없다.  국공립 대학들과 원하는 사립대학들만을 가지고 이런 '네트워크'를 만들고 이 '공공대학 네트워크'에 세금을 과감히 투입, 등록금을 무상이나 매우 적은 금액으로 하면서도 교육의 질을 높인다.  그렇게 '공공대학 네트워크'에 못 들어간 학생들만 사립대학에 가는 상황을 만든다면 장기적으로 상당수 사립대학도 이 네트워크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 '공공대학 네트워크'가 고등학교 졸업자의 30%만 수용할 수 있어도 대학의 공공성과, 학교의 공공성은 현저히 개선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처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말해온 것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절차와 예산까지 나와 있을 정도다.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경쟁을 시킨다' 라든가 '기업에서 사람 뽑는 방법이 먼저 바뀌어야...' 따위의 헛소리는 무시하자.  경쟁을 억제해야 사회가 유지된다.   지금의 죽기살기식 경쟁의 원인은 대학서열이다.  그러니 대학 서열을 깨뜨려야 한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2015년 5월 8일 금요일

[과학] 인간은 왜 이렇게 이상하게 되었나?

'인간은 털없는 원숭이일 뿐이다'
이것이 데스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가 1967년에 쓴 <털없는 원숭이(The Naked Ape)>의 기본 명제이다.  우리말의 '원숭이'는 실감나게 만들기 위해 쓴 것 같고 Ape 는 '유인원'을 말한다.  사람은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과 같이 생물 분류상 하나의 '과'를 이룬다(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특히 침팬지와 보노보는 사람과 더욱 가까운 친척 종(정확히는 '속')이다.  문제는 가장 가까운 이런 유인원들과도 사람은 너무나 다른 외형과 행동방식을 보인다는 점이다.  털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으며, 나무 위가 아닌 평지에서 생활하며, 상당부분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는 등 성적인 행동방식도 많이 다르다.  또한 높은 지능, 복잡한 언어, 정교한 손재주를 바탕으로 다른 유인원이 흉내도 못 낼 정도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침팬지나 보노보와는 전혀 달라 보인다.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특이하게 만들었나?  이런 의문은 나에게 매우 흥미있으면서도 과학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동안 내가 여기저기서 얻은 정보를 정리해 본다.


1. 직접적인 이유: 나무에서 내려왔기 때문

다른 유인원은 대개 나무 위에서 생활한다.  그래서 과일 같은 것을 주식으로 한다.  한 곳에서 먹이가 부족해지면 이동한다.  나무 위에서 생활하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그에 비해 땅 위에서 생활하는 것은 먹이를 구하는 것도, 다른 동물들로부터 자신이나 무리를 보호하는 것도 어렵다.  그런데 나무에서 살던 유인원이 불가피하게 나무가 없는 땅 위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유인원이 평지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으로 인간의 행동 중 많은 것이 설명된다.  숲이 아닌 평지(초원이나 사바나)에서는 일단 몸을 보호하기 쉬운 동굴 같은 곳을 근거지로 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에 따라 이동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 유인원 무리는 사냥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이 사실이 중요해진다.  사냥의 특성상 무리가 협력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직립보행하면서 손에 도구(무기)를 쥐는 것도 역시 사냥에 유리했을 것이다.  또한 우리들 중 특히 남자들은 축구나 골프 등 초원에서 달리면서 뭔가를 쫓아가는 일을 매우 좋아한다.  이것은 사냥할 때 쾌감을 느끼도록 뇌가 프로그램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래야 사냥을 열심히 해서 결과적으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므로).  지금처럼 거대한 문명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든 인간의 특성, 즉 다른 유인원에 비해 공격성이 현저히 낮고 서로 협력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 역시 원래는 사냥을 해야만 하는 환경에 적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는 일부일처제이다.  집단적으로 사냥을 하는 동물의 경우 한 쌍의 암수 사이의 평생 가는 관계와 공동 육아, 즉 일부일처제가 나타나는 일이 많다.  우두머리가 암컷을 독차지하는 일반적인 유인원의 행태는 사냥을 위해서 모든 수컷이 협력해야 하는 생존 조건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가 농사를 짓게 된 이후 대부분이 문명 사회에 살고 있다.  농사는 수만 년, 도시 생활은 수천 년밖에 안 됐으므로 인류의 본능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수컷(남자)끼리의 서열 다툼, 강한 수컷이 많은 암컷(여자)을 거느리려는 경향 등 유인원의 본능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한편으로 대부분의 인류가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한 가족 제도를 갖고 있음을 볼 때 유인원의 본능을 사회적 제도로써 억누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것은 나무에서 내려온 뒤, 집단적으로 사냥을 하던 시기에 생겨난 심리적 경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2. 왜 나무에서 내려왔나?

그렇다면 나무에서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유인원이 평지에서 살려면 삶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소규모 유인원 집단이 숲에서 나와서 살아가는 식으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자식 세대쯤 전멸하거나 다시 숲으로 들어가게 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인가?

갑작스런 기후 변화로 광대한 지역의 숲이 급격히 사라진 경우라면 어떨까?  그러면 거기 살던 수많은 유인원이 어디로 이동하지 못한 채 대부분 죽게 될 것이다.  그대로 멸종할 수도 있겠지만 일부 평지에 적합한 형질을 가진 개체들이 살아남아서 자손을 남길 수 있었다면, 점점 평지 생활에 적합하도록 진화한 종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기후 변화가 갑작스럽지 않더라도, 산맥이나 큰 강 등으로 인해 지리적으로 분리된 지역에 고립된 채 장기간에 걸쳐 숲이 서서히 없어진다면, 역시 평지에 적응한 종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나타난 시기를 전후하여 아프리카에서는 이러한 환경 변화가 실제로 있었다.  약 300만년 전, 떨어져 있던 남북 아메리카가 육지(지금의 파나마 지협)로 연결되면서 대서양에서 남북 아메리카 사이를 흘러 태평양으로 가던 해류가 막혀 지구 전체적으로 해류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이로 인해 북극,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의 기후가 변했다.  그 와중에 아프리카는 건조해져서 숲이 줄어들고, 그런 환경 변화가 유인원 일부를 평지에 적응하여 진화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3. 왜 지능이 발달했나?

나무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사냥을 하게 된 것으로 인간의 모든 특성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지능이 쓸데없이(?) 높고, 추상적인 내용을 표현,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림, 음악, 이야기 등 생활에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일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등,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기 위해서라는 틀로는 설명이 곤란한 측면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물에게는 '생존' 이외에 또 한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번식'이다.

사실 번식은 유전자 입장에서는 역시 생존이다.  유전자가 계속 '생존'하려면 개체(식물이나 동물 자체)가 일단 생존을 하고, 번식까지 성공해야 한다.  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생존과 함께 번식이라는 측면을 생각해야 한다.  현대 진화생물학에서는 인간의 지능이나 언어, 예술 등이 등장한 이유는 번식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예를 들어 수컷 공작새의 꼬리는 그야말로 쓸데없이 길고 화려해서 생존에 커다란 방해가 될 지경이다.  하지만 번식을 위해서 필요하다.  암컷이 그 꼬리를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암컷은 왜 그런 쓸데없는 형질을 가진 수컷을 선택하는가?  처음 시작은 아마도 긴 꼬리를 갖고 있다는 불리함에도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것이 다른 면에서 좋은 형질을 갖고 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우연히 어떤 작은 집단의 암컷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 이런 경향이 시작되면 양(+)의 피드백이 되어 멈추기 어렵다.  긴 꼬리의 수컷과, 그런 수컷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암컷이 어떤 집단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꼬리가 짧은 수컷은 암컷의 선택을 잘 받지 못해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어렵다.  짧은 꼬리의 수컷을 선택하는 암컷 역시, 그 새끼들 중 수컷은 꼬리가 짧을 것이고, 새끼들 중 암컷도 짝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서 번식에 불리해지게 된다.  이러다 보면 전체적으로 수컷의 꼬리가 길어지고, 그 중에서도 더 긴 꼬리를 갖게 되면 더 많은 선택을 받고 하는 식으로 세대가 내려갈수록 꼬리가 점점 길어지게 되며, 꼬리가 생존에 방해가 되어 번식의 이점을 상쇄할 지경이 되어서야 그런 경향이 멈추게 된다.

생존에 필요 없어 보이는 인간의 형질들 역시 그런 것일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높은 지능을 과시하는 구애 행동으로서 복잡한 언어나 그림 같은 것이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그런 것이 여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그 방향으로 급속한 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공작새의 꼬리 같은 경우는 암컷에게는 소용이 없고 생존에 불리함만 주기 때문에 암컷에게서는 해당 유전자가 억제되어 형질이 나타나지 않지만, 인간의 경우 두뇌의 발달은 여자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여자에게서도 그 유전자가 억제되지 않고 발현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경우 초기부터 사회적 생활 방식 등의 원인으로 인해 여자가 일방적으로 남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성 선택에 의해 발달된 형질인데 왜 남녀에게서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사모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를 했다거나 그림을 그렸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우스개로만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는 것도, 말을 유창하게 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도 따지고 들어가면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는 식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의도를 갖고 공부를 하거나 대화를 하는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각자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공부를 하고 대화가 즐거워서, 남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좋아서 유머감각을 발달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무슨 의도를 갖고 물건을 입으로 빨고 하는 것이 아니라도 결과적으로 그 행동이 면역성을 높여 생존을 돕듯이, 인간의 '인간다운' 행동들은 아마도 (우리도 모르게) 번식 성공률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이상한' 신체와 행동방식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일도 이제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이 압도적인 지능과 문화를 통해 수많은 다른 생물들을 멸종시키는 데까지 가고 있는 것은 무슨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우연이 겹쳐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인류처럼, 혹은 인류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갖고 있는 종이 생겨나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느니 하는 오만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이런 지식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2013년 1월 28일 월요일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자유시장은 모든 것을 타락시킨다

제목: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What Money Can't Buy)
지은이: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옮긴이: 안기순
출판사: 와이즈베리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내 나름대로 한 단어로 표현하면 '외부효과'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이 용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내 생각에 그렇다는 것이다.

서로의 합의에 의한 '거래'는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한 쪽이라도 손해를 본다면 거래를 안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거래를 보장하면 보장할수록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오류인 이유는, 거래는 거래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래로 인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나 사회 전체에 주어지는 영향, 그것을 '외부효과'라고 한다.

예를 들어, 지하수를 퍼올려서 병에 넣어 팔면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에게는 이익이 될 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자유롭게 허용하면 지하수가 고갈되어 그 지역에 식수난이 오거나 땅이 내려앉아 많은 사람들이 큰 곤란을 겪게 된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하루 얼마 이상 퍼올리지 못하게 한다든지 하는 '규제'가 필요하다.  즉, 자유시장에만 맡겨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석유를 퍼올려서 파는 회사, 석유를 정제하여 휘발유로 만들어 파는 회사, 그 휘발유를 사서 차에 넣고 몰고 다니는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거래로 인해 그 당사자들은 이익을 볼 수 있겠지만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인류 전체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자유시장을 절대선인양 찬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어떤 재화나 서비스는 자유로운 거래의 대상이 되면 그 가치가 타락한다는 것인데(책에서는 '부패'라는 말을 썼는데, 타락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이것도 '외부효과'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콩팥(신장)의 거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자유시장주의에 입각하면, 기증자가 콩팥을 경매에 붙이는 것이 가장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콩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공급'하고, 기증자(이 경우 기증자라는 말이 부적당하겠지만)에게 가장 큰 보상을 하는 방법이 아닐까?  맞다.  거래 당사자만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 거래의 외부효과를 생각해 보면 어떤가?  이런 거래가 허용된다면 부자들은 쉽게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이식할 장기를 공급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인데, 사람들이 이런 상태를 납득할 수 있는가?  아마도 사회 불안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예로, 인구 억제를 위해 여자 한 명당 2명의 자녀를 출산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이를 어기면 범죄로 간주하는 경우와, 여자 한 명당 2개의 출산권을 주고 이를 시장가격에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자.  인구 억제 효과는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출산권 시장이 있는 경우 부자들은 출산권을 사들여 더 많은 자녀를 낳을 수 있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더 많은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되어 더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역시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 사회 전체에 바람직하지 않은 '외부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든 예로 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운동경기장의 '스카이박스(luxury skybox)'였다.  전에는 대기업 임원과 일반 노동자가 똑같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바로 옆에 앉아서 함께 응원하며 같은 팀을 응원한다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돈을 많이 내는 회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 관람석인 스카이박스가 생기면서, 구단의 수입과 회원들의 만족도는 올라갔겠지만 운동경기 관람이라는 사회적 행위가 갖고 있던 사회통합의 효과는 사라지고 오히려 부자와 일반인의 이질감을 키우는 바람직하지 않은 '외부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무엇이든지 자유시장거래의 대상으로 만들려는 장사꾼들이 판치고 있다.  하지만 효율성이니 경제성장이니 하는 그들의 주장을 한 꺼풀 벗기면, 사회 통합이나 인권, 평화 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희생시켜 돈을 벌려는 그들의 장삿속이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장사꾼들에게 속아 중요한 것들을 빼앗겨 왔다.  이제 여기서 더 이상 가면 사회가 버티지 못할 지경까지 가고 있다.  자유시장의 이러한 문제점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그러한 시도에 대해 확실히 '안 돼!'라고 외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책] 클라우드 아틀라스 - 문명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요즘 소설을 잘 안 읽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게 되면서 다른 일에 지장을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삶이 더 각박해졌다고나 할까?  그래도 오랜만에 <클라우드 아틀라스>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어떤 분이 구글플러스(Google+)에 이 책이 영화화된다는 소식과 함께 이 작품의 특이한 구성에 대해서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읽게 된 것은 구성 방식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형식은 껍데기이고 포장일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 그리고 거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것일 것이다.

제목: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저자: 데이비드 미첼(David Mitchell)
역자: 송은주
출판사: 문학동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여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여섯 편을 연관지은 방식이 특이하다.  우선 각각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모두 어깨에 혜성 모양의 반점을 갖고 있으며, '구름의 지도책(클라우드 아틀라스)'라고 불리는 대상이 등장한다.  각각의 주인공과 각각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사이에 별다른 일관된 점은 없다.  여기까지는 별로 특별하다고 할 수 없지만 여섯 편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 특이하면서도 흥미롭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항해일지의 형태인데 중간에 느닷없이 끊겨버리고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두 번째 이야기는 편지글의 형태인데, 첫 번째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두 번째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책이 파본이어서 이야기가 중간에 끊겨 있고, 그 끊긴 곳이 바로 이 책에서 첫번째 이야기가 끊긴 그 곳이다.  어쨌든 두 번째 이야기인 편지글도 진행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중단되고 세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세 번째 이야기는 보통의 소설 형태로 되어 있다(해설에 의하면 '하드보일드' 소설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음).  두 번째 이야기는 여기에서 누군가(즉,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가 남긴 편지뭉치의 형태로 등장하며, 손에 넣은 것이 어느 시점까지의 편지이기 때문에 중간에서 끊어진 것이다.  한편 세번째 이야기는 자체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다가 역시 중단되고 네 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네 번째 이야기는 수필처럼 보이는데 영화화를 겨냥하여 자신의 경험담을 써 놓은 것처럼 되어 있다.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는 소설책의 형태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2권 중 1권밖에 구하지 못해서 거기까지만 읽은 것이다.  한편 네 번째 이야기도 잘 나가다가 중간에서 끊기고 다섯 벗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어떤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을 심문하는 과정을 녹화한 동영상의 대화 내용이다. (이 동영상은 '오리진'이라는 알 모양의 장치에 저장되어 있는데, 오리진은 동영상을 재생하는 기능도 있다. PMP같은 것인가 보다.) 배경은 가까운 미래의 '한국'이다.  네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이 우연히 보게 된 영화로 등장하고,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네 번째 이야기가 끊겨 있는 바로 그곳에서부터 못 보게 된 것이다.  다섯번째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하며 전개되다가 역시 중간에 끊기고 여섯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여섯 번째 이야기는 전쟁으로 문명이 파괴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이 사는 곳은 가진 것 없이 어렵게 살지만 인간성을 회복하여 서로 도우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공동체인데, 어느날 바다 건너의 발달된(파괴 이전의 상태와 더 가깝게 회복된) 문명의 세계에서 '특사'가 파견되어 같이 지내게 된다.  이 특사는 휴대용 동영상 재생기인 오리진을 갖고 있는데, 주인공(마을 원주민)이 우연히 오리진을 조작하다가 다섯 번째 이야기인 그 동영상을 재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들켜서 다 보지 못한다.  이야기는 유일하게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데, 결국 첫 번째 이야기와 비슷하게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반복된다.  어쨌든 여섯번째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주인공이 미처 다 보지 못했던, 오리진에 들어있던 동영상을 마저 보게 된다.

그리하여 중단되었던 다섯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진술을 계속하고, 다 마친 후에 전에 보다 중단했던 그 영화를 보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럼으로써 네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흥미진진한 모험을 마치고 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제2권을 구하여 읽는다.

그렇게 세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주인공은 사건을 해결하고 나머지 편지들을 찾아내어 읽는다.

그것으로 두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진다.  여러 일들을 겪은 후에 주인공은 파본으로 뒷부분을 읽을 수 없었던 책을 다시 구해서 나머지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렇게 첫 번째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지고 결말을 맺는다.


원래는 여섯 번째 이야기 안에 다섯 번째 이야기가, 그 안에 네 번째 이야기가 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액자들의 안팎을 뒤집어버린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가끔 느끼는 것인데, 소설가들이 창의적이긴 한 것 같다.  그냥 여섯 편을 모아 놓았으면 이 책이 이런 관심을 받지는 못했을 것인데,  창의적인 구성으로 독자의 흥미를 더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형식과는 별도로, 내용 중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다섯번째 이야기였다.  배경이 '한국'이기도 했고, SF인데다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전개되어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내용은 씁쓸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국은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단점만 모아놓은 것같은 곳이다.  남한의 착취경제와 북한의 통제사회가 결합된 디스토피아...  보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설정은 전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Moon>이라는 영화(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더 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었다)에도 규모는 훨씬 작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영화의 배경은 한국 기업이 운영하는 달 기지였다.  외국에서 한국은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는 사회' 정도로 비춰지는 것인가 싶다.

이 책 전체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지만, 쉽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꼭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내 나름대로 드는 생각은, 모든 이야기에서 일종의 '노예'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가까운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19세기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에서부터,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했다고 여겨지는 가까운 미래, 심지어 그 문명이 무너지고 나서도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것을 폭력적으로 착취하는 행태는 계속된다.  문명이 발달하면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실상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착취하는 기술이 오히려 더 정교해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도 실질적인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못하면서 힘들게 일을 해도 겨우 먹고살기도 어려운 사람들. 노예같은 삶이 분해서 '주인'에게 대들면 그 주인은 해고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주변사람들까지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는, 신식 채찍을 휘두른다.  남태평양의 미개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공격하여 노예로 삼고서 물리적인 재찍을 휘두르던 데서 무엇이 나아졌을까?  이런 식의 변화는 발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착취', '노예' 같은 것으로 가리킬 대상이 없어졌을 때야말로 문명은 겨우 첫걸음을 떼는 것이 아닐까.

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책] 크로마뇽 -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들

제목: 크로마뇽(Cro-Magnon: How the Ice Age Gave Birth to the First Modern Humans)
지은이: 브라이언 페이건(Brian M. Fagan)
출판사: 더숲

<지구에서 온 사나이(the Man from Earth)>라는 영화에는 크로마뇽인이 어떤 이유로 현대까지 살아있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우리도 크로마뇽인이다.  비록 우리가 '크로마뇽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주로 수만 년 전에 동굴이나 허술한 천막에서 살면서 사냥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일컫지만, 그들은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신체 구조와 정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크로마뇽인 아기를 현대에 데려와서 키우면 현대인과 다를 바 없이 잘 살 것이다.  또한, 지금도 지구상에는 수만 년 전과 별 다름 없이 살고 있는 '크로마뇽인'들이 있다.  '크로마뇽인'과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이유는 그동안 축적된 지식과 사회제도, 문화 같은 것이 우리에게 그들과 다른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이 책(<크로마뇽>)에서는 크로마뇽인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사냥을 해서 살아갔으며, 빙하기에도 살던 곳에서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순록 같은 동물을 사냥하며 살았다.  다른 종인 네안데르탈인과 같이 살아가기도 했지만, 네안데르탈인은 결국 멸종했고 크로마뇽인만 살아남았다.

이 책에서는 크로마뇽인들의 기술적, 예술적인 능력이 현대인과 다름 없었다는 증거를 많이 볼 수 있다.  나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의 과학기술, 그들이 쓰던 도구들이다.  나는 '뗀석기'라는 것이 그냥 돌을 아무렇게나 깨뜨려 모양에 맞게 이용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상당히 계획적으로 만든 도구였으며, 뗀석기의 좋은 재료가 되는 돌을 찾기 위해 매우 멀리까지 가거나, '무역'을 하기도 했다.  정교한 석기를 써서 뼈나 뿔을 쪼개고 다듬어 화살촉이나 낚싯바늘, 심지어 옷을 만드는, 귀가 있는 바늘도 만들었다.  이 책에 의하면 크로마뇽인을 번영하게 해 준 두 개의 기술 혁신은 바로 '투창기'와 '귀가 있는 바늘'이다.

투창기는 멀리서도 창을 던질 수 있게 해서 사냥 도중에 죽거나 중상을 입는 사람들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매머드같은 대형 초식동물이 멸종한 것도 투창기로 무장한 인간들의 '대량학살' 때문으로 생각된다.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나타나고 천년 남짓한 기간에 남북아메리카 전역에서 대형 동물이 모두 사라졌고, 이들이 내뱉는, 강력한 온실효과를 갖는 메탄이 감소하여 빙하기가 왔다는 말도 있다.

귀가 있는 바늘은 가죽으로 만든 옷을 몸에 맞게 만들어 여러 겹으로 겹쳐 입을 수 있게 함으로써 추운 날씨에도 활동할 수 있게 했고, 이 때문에 크로마뇽인의 거주 지역은 매우 넓어졌다.

우리 집에 <아이스 에이지>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DVD가 있는데, 거기서는 이미 멸종한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매머드, 검치호랑이, 땅나무늘보(megalonyx), 그리고 '인간'이다. DVD 해설에서는 이 인간이 네안데르탈인이라고(따라서 역시 멸종한 동물이라고) 나오지만, 이 책에서 얻은 정보에 비추어 옷이나 도구, 장신구, 그리고 벽화를 그리는 등의 생활 양식을 가지고 판단해 보건대 영화 속의 인간은 크로마뇽인에 가깝다.

크로마뇽인은 생각보다 우리와 가깝고,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실 우리의 행동양식은 협동해서 사냥을 하던 크로마뇽인에게 더 적합한 것이 많이 있다.  미술도 그들의 것에 뿌리를 둔 것은 명확하다.  남아있지 않아서 그렇지 음악도 그럴 것이다.  크로마뇽인이 사용하던 창과 투창기가 발달해 화살과 활이, 포탄과 대포가, 총알과 총이 만들어진 것이고,  현대의 바늘이나 낚싯바늘 같은 것은 재료만 바뀌었지 크로마뇽인이 사용한 것에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고고학 역시 현재의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죽은 것을 파헤쳐 기록하는 활동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크로마뇽인 시절에도 기술혁신이 있었고, 문화의 전파가 있었고, 환경파괴도 있었으며, 그들도 우리처럼 낙서도 하고 '쓸데없는' 물건을 만들기도 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이상하게 친근하게 느껴진다.

2012년 3월 3일 토요일

[책] 시간을 파는 남자 - 자유를 찾아서

제목: 시간을 파는 남자(El vendedor de tiempo)
저자: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Fernando Trias de Bes)
출판사: 21세기북스

5분에 1.99달러...
1.99달러를 주고 산 빈 통을 열면 언제건 5분의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돈을 주고 구입한 사유 재산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고용주들이 그만큼 급료를 깎을 수는 있겠지만, 5분에 해당하는 급료가 보잘것 없다보니 그것도 소용 없다.

시간을 판다고 말은 하지만 주인공인 TC('보통 남자') 가 실제로 파는 것은 '자유' 다.  5분 동안의 자유를 1.99달러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포기하고 자유를 구입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는 시간(자유)이 없기 때문에, 5분에 해당하는 급료보다 훨씬 비싼 돈을 주고 5분을 구입한다.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이 사회,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의 핵심을 건드린다.  나는 이처럼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는 없지만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은 많다.
말하자면, "근무시간을 줄이고 월급을 덜 받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에게 적당한 노동의 양은 '반일 노동' 그러니까 하루 4시간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정도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말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리트윗'하고 다녔다.  지금의 반만 일하고, 월급을 반으로 줄인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그래서 알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월급을 지금의 반만 받는다면 살아갈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지금의 상태에서 내 월급만 반으로 줄어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사회 전체가 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돈은 적고 시간이 많다면? 차 안 사고 웬만하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않을까?, 외식 덜 하고 대신 집에서 요리해 먹지 않을까?  비행기 여행 덜 다니고 기차여행을 다니지 않을까?

그러면 소비가 줄어들어 산업이 망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것도 과연 그럴까?  월급이 적은 대신 실업자가 없어지면 그들도 적당히 소비를 할 것 아닌가?  보석이나 고가 핸드백, 휴대폰, 자동차 등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 않은 것들은 소비가 줄겠지만 식품 같은 생활 필수품은 소비가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산업이 그쪽으로 발달할 것이다.  사실, 노동시간이 반으로 준다고 해서 월급이 반으로 줄 것 같지도 않다(필요한 노동자의 수가 많아지므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주주의 이윤이 줄어들겠지.

내가 '반일 노동' 이야기를 할 때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교사였다.  교사 월급이 반으로 줄면, 정말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지금처럼 차 굴리고, 외식하고, 비행기 여행 다니고, 아이들 사교육 시키고, 비싼 아파트를 먼저 사고 대출금을 갚고 하는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것들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는가?  낮은 월급과 걸핏하면 당하는 해고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내가 차 못 굴리고 아이들 사교육 못 시키는 고통을 더 크게 생각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사회의 체제 그 자체일 것이다.
체제란 지배-피지배 관계를 듣기 좋게 부르는 이름일 따름이다.
고대, 중세에는 지배자들이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이라고 속여서 그 '체제'를 유지했을지 모르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일자리의 개수를 줄이고 그것을 못 얻으면 큰 고통을 받게 만들어 '실업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는 것 같다.  직장이 있어도 장시간 노동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직장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유지되지 못하는 이런 사회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당연히 '지배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99%'의 피지배자를 '노예'로 만들어 최대한 이윤을 짜내려는 자들이 만든 체제인 것이다.

<시간을 파는 남자>에서 사람들은 월급을 덜 받고 자유를 얻는데 기꺼이 동참하고, 결국 '체제'는 붕괴한다.  현실에서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은 자기들의 천국인 현 체제가 흔들릴 것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불평등', '착취', '노예'
아직도 이런 말들로 사회를 묘사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려면 자유를 주어야 한다.